몹시도 추운 날이었다. 눈이 채 녹지 않아 앙상해진 나무들 위로 눈이 가득한 산이 보였다. 겨울 시골 마을은 차가운 바깥 공기와 눈덮힌 산, 그리고 시골집의 따듯한 연기가 잘 어우러져 나름의 정겨움이 있었다. 내가 겨울을 좋아하는 수 많은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이동하던 중, 산 중턱에 있는 기숙학원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이내 마음이 갑갑해져왔다. 뭔가 재입대 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통제받는 생활이 안끝날지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룸메이트는 제대로된 인간일지’, ‘밥은 잘 나올지’, ‘자습실은 괜찮을지’, ‘화장실은 깨끗할지’, ‘침대는 쓸만할지’ 등 머릿속이 복잡해질 때 즈음, 입구의 바리게이트가 보이고 직원 선생님이 보였다. 여기도 온통 네모 투성이었다. 대학교부터 군대 그리고 기숙학원까지 내 20대 초의 청춘은 네모난 건물들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듯 했다.
들어가자 마자 바로 왼편에 학생들이 생활하는 건물이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거창한 의미가 담겨져 있을 것 같은 한자이름의 건물이었다. 꽤 빨리 도착한 편이라 사람들이 많이 없었다. 같이 온 아버지와 같이 내부에 들어가니 내 고등학교 기숙사 시절이 단번에 떠오를 만큼 흡사하게 생겼어서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왜 안심이 되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들어가는 길에 화장실도 한번 확인 해주고, 문이 살짝 열려있는 방은 슬쩍 구경도 하면서 내 호실을 찾아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에 ‘기존의 학생이 주말이라 쉬고있을 수도 있으니 노크를 반드시 하라’는 직원 선생님의 말이 떠올랐다. 괜시리 긴장이 되었다. 심호흡을 하고 문을 두드렸으나, 다행히 기척이 없었다.
이층침대가 두개 있었고, 두개가 붙은 옷장이 2개가 있었다. 아버지는 짐정리를 도와주시려고 하였으나 죄송스러워 내가 하겠다고 하였다. 갑자기 도망가고싶어졌다. 필요없다고 느껴졌던 대학생활이 간절해졌다. 아늑한 내 방이 그리워졌다. 내 마음대로 어디든 갈 수 있었던 자유가 소중해졌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끔찍하고 고통스럽겠지만 꼭 겪어야 하는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있었다. 이제 마음 한켠에서 나를 짓누르던 무언가를 없앨 때가 되었다. 걱정스럽지만 힘차게 ‘좀만 버텨라!’라고 응원해주시는 아버지를 보며 크게 말했다. ‘별거아니야! 추우니까 빨리 들어가!!’ 이 짧은 두마디 인사를 끝으로 나는 빠르게 생활관으로 올라갔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걱정시켜드리고 싶지 않았다. 잡 생각을 잊으려고 짐정리도 잽싸게 다 해두었다. 곧 있으면 설명회가 있는데 아직 룸메이트들은 오지 않은 듯 했다. 이 시간을 견뎌낸 나는 분명 행복할 것이라고 굳게 믿기로 했다.
룸메이트를 기다릴 새도 없이 곧바로 설명회를 하는 곳으로 올라갔다. 조금 기다리니 사람들이 점점 모이기 시작했다. 이상한 옷을 입은 직원 선생님들이 들어왔다. 처음에 필요한 서류를 작성했다. 돈과 관련된 것도 있었고, 학원의 생활시스템에 대한 안내, 강의의 전반적인 커리와 자습시스템에 대한 안내가 줄줄이 이어졌다. 지루하지만 열심히 받아적었다. 이곳은 룰에 의해 통제되는 곳이었고, 이곳의 룰을 알아야 내가 그나마 숨을 쉬고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학원에서 정해준대로만 공부하는 것은 싫어하는 타입이고 강의만 들어서 될 것이 아니라 내가 내것으로 만드는 시간들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원장이 등장했다. 꽤 유명한 사람이었다. 본인이 자격증을 따고 왔는지 갈라서 책상을 따로 앉게 시켰다. 그냥 파악만 해도 될 것을 벌써부터 나누고 그러나 싶었다. 사실 의도는 뻔했다. 미리 준비한 사람과 아닌 사람을 구분해서 준비가 덜 되어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채찍질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고는 대뜸
본인이 ‘다음 시험에 붙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손을 들어보라’ 하였다.
아무도 없었다가 한명이 손을 들었다.
원장이 바깥에서 하다 왔냐고 물었다.
아니라 했다.
다시 원장이 자격증 따놓은 것은 몇개냐고 했다.
하나도 없다고 답했다.
원장이 법대생이냐 물었다.
이과생이라고 답했다.
원장이 박수를 쳤다.
원장은 손들지 않은 사람들은 반성하라며 다그치고는 본인이 물어본 의도는 이런 마음가짐을 보려고 한 것이라고 했다. 어이가 없었다. 그러고는 아직 시작도 안한 신입생들에게 나쁜 예를 들며 혼을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연애를 하지말고, 휴대폰을 하지 말고, 술을 먹지 말라고 했다. 중간에 적발되어 벌점이 쌓이면 퇴학이라는 둥, 하지도 않은 일 가지고 한시간 가량 혼구녕이 났다. 기분이 나빴다. 다들 성인이고 제발로 왔는데 여기가 중고등학교도 아니고 그때 들을 법한 설교를 듣고 있자니 속이 쓰릴 지경이었다. 다들 결의에 차서 왔을 텐데 힘빠지는 소리만 늘어놓는 원장이 원망스러웠다. 그렇게 안타까운 시간이 지나고 밥시간이 되었다. 밥은 지하에 식당에서 나왔고, 그럭저럭 먹을만 했다.
양치를 하고 곧바로 자습실 배정에 들어갔다. 그 전에 이 학원 커리큘럼에 따른 책을 매점에서 줄서서 사는 시간이 있었다. 솔직히 기숙학원비를 생각하면 책은 그냥 줄것으로 기대했는데 대실망이었다. 바깥에서 사는것 보다 같거나 비쌌다. 프린트기가 있길래 이건 공짜겠지 했는데 수업 보조자료를 나눠주면 알아서 프린트 해오라고 시켰고, 매점에서 돈주고 하라는 것이었다. 그 때부터 이 학원에는 기대를 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그러고 바로 자습실 배치가 이어졌다. 정말 기대도 안했었는데 자습실만 최근에 리모델링해서 그런지 프렌차이즈 독서실 브랜드가 들어와있었다. 너무 기분이 좋았다. 건물 외관은 책상다리 하나 안부러져 있으면 다행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였는데 정말 다행이었다. 그렇게 내 자리를 마주했다. 입구와 가까웠고, 고장난 곳은 없었다. 의자도 깨끗했다. 내 장비들을 하나하나 풀었다. 스톱워치, 필통, 기존에 쓰던 노트와 책들, 이번에 구입한 책들을 보관함에 넣었다. 첫 날이라 그런지 하나하나 정성을 다 했던 것 같다.
첫 날이라 따로 자습은 강제로 시키지 않는다고 하였다. 공부를 할사람들은 오늘부터 하고 늦게와도 좋다고 했다. 나는 주어진 시간에 계획 짜기 딱 한가지만 하고 내려왔다. 안내문으로 받은 커리에 맞추어서 내 자습계획을 얼추 짜놓았다. 각 과목마다 복습과 예습시간을 적절히 분배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더욱 세부적인 것은 실강을 들어보고 난 뒤 정하기로 하고 일찌감치 독서실에서 나와서 생활관으로 향했다.
내려가니 내 생활실에는 룸메이트들이 짐풀기에 한창이었다. 이런저런 말을 하며 조금 친해졌고, 난 먼저 씻고 와서 누웠다. 룸메이트들은 모난 곳 없어 보였고 전부 또래였다. 그리고 다 잘생겼었다. 몸도 다 좋았다. 왠지모를 패배감이 들었다. 얘기를 하다보니 첫날부터 운동장을 뛰고 오는 사람부터 인강을 듣고 있는 사람들까지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은 것 같았다. 누워서 운동도 공부도 어느것하나 게을리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경솔했다. 여기는 생각보다 훨씬 간절하고 훨씬 대단한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만은 하지 않기로 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기숙학원에 들어온게 여러모로 잘된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와 가족의 얼굴부터 할머니 할아버지 친한친구들까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생각났다. ‘꼭 합격해서 기쁜마음으로 웃으면서 만나러가야지’라 생각을 하며 룸메이트들의 어색한 인삿말과 함께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잠에 들었다. 내 겨울 기숙학원의 첫 날은 그렇게 지나갔다.